홍순영, 5월 12일

2022. 5. 11. 11:24아빠랑

들리세요? 제 목소리!

엄마, 저예요. 순영이!
저 지금 어디 가고 있게요?
언젠가 엄마가 말했잖아요.
제가 뱃속에 있을 때
빨간 고추, 초록 고추가 
주렁주렁 매달린 태몽을 꿨었다고.
저 지금 엄마가 꿈속에서 보았던 
길을 지나가고 있어요,
태양이 눈부신 길을 걸어가고 있어요.
진짜 신기하죠?

엄마, 저는 다른 세상을 향해 가고 있어요.
제 몸은 빛이 되었다가, 물이 되어 흐르다가
여러 가지 색으로 변하기도 해요.
엄마, 제 몸이 점점 투명해지고 있어요.
풍선처럼 기분 좋게 떠오르고 있어요.

그런데 엄마, 
저는 이렇게 가벼워지려는데 
너무 멀리 와버려서 심부름도 못하는데
된장국 끓이다가 두부가 없을 때 어떻게 해요?
심부름 하나는 자신 있었는데
천 원씩 심부름값 모으는 재미가 쏠쏠했는데
우리 엄마 심부름은 누가 대신 하지요?
그런 생각하면 눈물이 고여서 소매로 눈가를 꾹 눌러요.
엄마가 무심코 내 이름 부르다가 
싱크대 앞에 덜썩 주저앉아 울까봐.

엄마, 그럴 땐 저를 생각하세요.
예전에 제가 씻고 나와서 수건 한 장만 달랑 걸치고 
엄마 앞에서 실룩실룩 춤췄던 거 기억 안 나요?
그때 환하게 웃던 엄마가 그리워요.

그리고 아빠!
또래 친구들이 자전거 타고 지나가는 것만 봐도
가슴을 쓸어내리는 아빠. 
물속에서 배고프지 않을까, 춥지 않을까.
캄캄하게 떨며 울고 있지 않을까.
답답해서, 돌덩이를 삼킨 듯이 가슴이 답답해서
가슴을 치며 우는 우리 아빠.
괜찮아요. 저는 이렇게 가볍고 환한걸요.

아빠도 알고 있었죠? 제 인생 계획!
삼십대에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사십대에 외국에서 사는 거였잖아요.
그 모습 못 보여드리고 먼저 가서 미안해요.
그렇지만 저요. 여기서도 건강하고 씩씩한걸요!
아빠, 요즘 병원에 다니는 것도 힘드시죠?
저 없다고 집에만 있지 마시고
밖에 나가서 새로 핀 꽃도 보고 신선한 공기도 마셔요.
저랑 같이 산책하던 길도 가보세요.
엄마랑 거기 가서 차도 좀 드시고요.
아빠가 건강하셔야 저도 마음이 놓여요.
저처럼 운동도 하고 바람도 자주 쐬러 나가겠다고 
새끼손가락 걸고 도장 찍고 약속해요!

누나야!
이름만 불러도 뭉클한 나의 누나야!
누나도 바쁜데 빨래도, 설거지도, 청소도
더 많이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해.
엄마 아빠 병원에 가 계실 때
제일 많이 아껴주고 보살펴주던 누나였는데 
마귀할멈이라고 불러서 미안해. 
그렇지만 누난 내 마음 알지?
마귀할멈이 아니라 수호천사라고 생각한다는 거!
쑥스러워 말 못했어.
내가 얼마나 누나를 그리워하는지.
나 때문에 울지 말라고
지금 이 순간에도 
내가 얼마나 누나의 뺨에 뽀뽀해주고 싶은지
누나가 나를 지켜준 만큼 이제는 내가 누나를 지켜줄게.
힘들 때마다 누나 곁을 지키는 수호천사가 될게.

엄마, 아빠, 누나, 매형, 현우야, 동혁아, 예원아, 수현아.
슈퍼 아주머니, 선생님, 우리 반 친구들아!
모두 잘 지내고 있니?
모두 안녕하세요?
제가 아는 사람들 한 명, 한 명, 이름 부르고 싶어요.
반갑게 손 흔들며 인사하고 싶어요.
지금 생각하니 더 잘해줄걸 아쉬워요.
매형한테도 오므라이스 위에 
케첩으로 하트 그려서 만들어줄걸.
부모님이랑 더 자주 영화 보러 갈걸.
아 맞다! <ADHD> 친구들한테 캐리커처도 
못 그려주고 왔는데
같이 있을 때 더 많은 추억을 남기고 올걸. 

지금은 손이 닿지는 않는 곳에 있지만
서로 얼굴을 만질 수 없는 곳에 있지만
모두들 너무 걱정 마세요.
저는 하늘 높이 올라서
구름이 되고 바람이 되고 흙이 되어 
여러분 곁에 있을게요.
늘 다니던 동네 슈퍼, 운동장, 학원 근처에서 
생생하게 웃으며 안녕, 하고 인사할게요.

노란 리본을 묶어주신 분들.
생일 모임에 와주신 분들.
이렇게 따뜻한 생일상 차려주셔서 감사해요.
오늘을 행복하게 기억할래요.
여러분 덕분에 외롭지 않아요.
사랑해요. 모두. 제가 더 많이 사랑해요.

- 그리운 목소리로 순영이가 말하고, 시인 신미나가 받아 적다.


《엄마, 나야.》 중에서 



사랑하는 내 아들 순영아.

아기 때부터 울지도 않고 순둥이였던 내 아들, 잘 지내고 있니?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도, 중학교에 들어가서도, 또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도 늘 친구보다 엄마를 더 생각해 주던, 엄마의 애인이자 친구 같았던 내 아들 순영아, 보고 싶구나.
엄마의 부탁이라면 한 번도 불평 없이 들어주던 순영이가 옆에 없으니, 이렇게 또다시 봄이 오려는 소리가 들리면 가슴이 아프구나.
등교할 때 엄마 차에서 같이 노래하며 웃었던 기억에, 보조석 자리는 아직도 우리 순영이 자리 같구나.
엄마에게는 보물이었던 우리 아들.. 그립고 또 그립다.
언젠가 꼭 다시 만날 수 있겠지?
엄마에게 늦둥이로 태어나 더더욱 이뻤던 소중한 내 아들이 엄마 곁을 떠난 지도 벌써 4년이 되었구나.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많이 아프고 슬프지만, 하나님 곁으로 갔을 내 아들 생각하며 매일 기도하고 있어.
천국에 가서 내 아들을 꼭 다시 만나게 해달라고, 꼭 다시 안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말야.
하나님께서 들어주시겠지?
엄마는 이 작은 희망으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단다.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던 우리 순영이가, 한의사가 되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며 산다고 했을 때 엄마는 정말 뿌듯했어. 우리 아들 참 잘 자라 주었구나 하는 생각에..
엄마는 우리 순영이한테 해준 것도 별로 없는 것 같은데, 우리 아들은 너무 착하게 잘 커줘서 고마웠어.
그리고 엄마에게 늘 웃음을 주고, 행복을 주고, 사랑을 줘서 정말 고맙다, 내 아들..
지금도 아침마다 "아들, 학교 가자."라고 말하면, 하교 시간이 돼서 현관문을 열고 "마미, 아들 학교 다녀왔어요."라고 말하며 네가 들어올 것만 같아.
그 일상들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그때는 몰랐단다. 그리운 그날들이 천국에서는 이뤄질까?
엄마에게 사랑을 알려 주고 간 순영아.
엄마는 순영이를 너무 사랑한다. 
그립단 말이, 보고 싶단 말이, 문장으로 다 표현이 안 되는구나.
엄마랑 다시 만나는 그날까지, 해맑던 그 웃음 잃지 말고, 항상 밝고 즐겁게 잘 지내렴.
사랑한다, 그리운 내 아들..

엄마가.


《그리운 너에게》 중에서


5월 12일, 서로에게 보물이었던 홍순영과 그 가족, 그리고 우리에게도 미처 깨닫지 못한 일상의 소중함을 새삼 떠올리며. 

반응형

'아빠랑'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의 불행을 거두어내기 위해  (0) 2022.05.27
땅에 떨어진 노란 별  (0) 2022.05.13
곽수인, 4월 30일  (0) 2022.04.28
바사삭 향긋한 쑥튀김  (0) 2022.04.27
이단비, 4월 26일  (0) 2022.0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