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4. 28. 15:38ㆍ아빠랑
어느 봄날에
노란 종이배에 적어 보낸 수없이 많은 소망들이
별이 되어 빛나는 우주의 한끝에
그리움이 연둣빛 새순처럼 자라나는 곳
사시사철 분홍 꽃 피는 봄날의
우주 한끝에 저는 살고 있어요
함께 지내던 친구들과
이제는 아프지 않은 이모와
더없이 좋은 날들 보내고 있어요
재능이는 여전히 제가 입도
뻥긋하기 전에 웃음을 터뜨리고
재영이는 어려운 수학문제를
척척 가르쳐주고
봉석이랑 세호도 함께하니
늘 즐거울 수밖에요
그래도 가끔씩 명치끝이 아려오는 건
정인이의 스무 살 생일에
엄마 아빠의 스무번째 결혼기념일에
사랑해요 고마워요
함께 말할 수 없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저는 별빛을 사용하기로 했어요
별빛이 눈이 시리게 빛나면
제가 우리 가족에게 사랑해요
말 건네는 거예요
머리 위에 두 손을 얹어
하트 별빛도 만들어 보낼게요
전 키가 크고 팔이 길어
커다란 하트로 빛나겠지요
귀엽고 귀여워
놀려주고 싶던 내 동생 정인아
오빠가 보내준 조끼는 잘 챙겨놨겠지
단원고등학교에 입학했다며
내가 다니던 교정에서 친구들과 함께
공부하는 네 모습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아
정인아 요즘도 울 오빠는 나쁜 남자
스타일이라고 얘기하고 다니니
오빠는 상남자 스타일인데
오빠는 여기서도 매일 우유 천 밀리리터를 원샷하고
아령을 하고 있어
어디에 있든 너를 지켜주고 싶거든
정인아 오빠가 떠올라 견딜 수 없을 땐
엄마 아빠랑 꼬옥 끌어안고
실컷 울어 대신 운 만큼 웃기다
그리고 이다음에 말이야 정인이 같은
말괄량이라도 한눈에 반한 남자 있으면
알콩달콩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해서
널 닮아 귀여운 아가들 데리고 바닷가에
놀러오렴 우리 곁에 멋진 삼촌이 있어
너희들을 지켜주고 있으니 아무 걱정 말고
모래성도 쌓고 파도랑 술래잡기도
하라고 얘기해주렴 그때쯤 되면
정인이도 바다의 여러 가지 빛깔을
받아들일 수 있겠지
엄마
정인이하고도 공유하기 싫었던
엄마는 언제나 나만의 엄마죠
전 지금 친구들이랑 잘 지내고 있어요
여기서도 제가 먼저 웃는 개그를 해요
엄마 반응은 언제나 썰렁했지만
아직도 제 개그에 까르르 넘어가는
친구들이 있어 전 외롭지 않아요
언젠가 엄마를 다시 만나게 되면
엄마도 넘어갈 만한 개그를
개발하려고 연습중이에요
엄마 다시 저랑 만날 땐
뿜을 준비 단단히 하고 오세요
그리고 엄마 말대로 전 웃을 때
권상우를 닮았대요 여기서 여자애들이
다 그러데요 그래도 전 일편단심
엄마뿐인 거 아시죠
엄마는 언제나 절 기다렸으니까
결혼하고 10년을 기다려 저를 만났고
게임만 하던 제 곁에서 책 읽으며
8개월 동안 말없이 기다려줬지요
엄마 같은 여친이 세상 어디 있겠어요
엄마는 제 인생 최고의 여자친구였어요
18년 사귀는 동안 엄마랑 저랑
많이 다투기도 하고 화해도 금방 했는데
제가 먼저 오게 돼서 사실
그게 젤 미안해요 그러니 여기서는
제가 엄마를 기다리고 있을게요
엄마의 영원한 남친 수인이가
아빠 우리 아빠
아빠 닮아서 저 은근 상남자인가봐요
그마운 게 너무 많은데 말하지 못했어요
오늘부터 아빠 아들 수인이는
고마워요 사랑해요
말하는 진짜 상남자가 되려고 해요
제가 기나긴 여행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아빠가 차에 태워 실컷 드라이브
시켜준 거 정말 고마웠어요
아빠 냄새와 제 냄새만 나는 공간에서
말없이 함께한 그 시간
얼마나 행복했는지 몰라요
가족끼리는 원래 서로 냄새 맡는 거잖아요
사랑하는 아빠랑 도보 여행 한 것도 참 좋았어요
아빠가 제 사진을 목에 걸고 걸어가니까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가
목말을 타는 것 같았어요
아빠 어깨 위에서 바라본 근사한 풍경들과
저를 위해 함께 걸어주신 분들 잊지 않을게요
아빠 수인이가 못 견디게 보고픈 날엔
코를 킁킁거려보세요
제 발냄새가 날 거예요
제 땀냄새가 날 거예요
키 186센티미터 신발 310밀리미터의 듬직한 아들
수인이가 항상 곁에 있을 테니까요
아! 오늘이 제 열아홉번째 생일이네요
엄마 아빠 정인아
내 사랑하는 친구들아
다들 와줘서 고마워
케이크 위 열아홉 개의 촛불은
내 사랑하는 모든 이들과
함께 끄고 싶었거든
우리 이제 모두 함께 따스한
숨결 모아 열아홉 개의 촛불을 불어요
마음속 소망의 별빛이 더 환히 빛나도록
모두의 서러운 이마를 수인이가 쓰다듬어드릴게요
이루어지지 못한 소망을 끝까지 지켜봐드릴게요
사랑해요
눈이 내리면 박효신의 <눈의 꽃>을
흥얼거리며 하늘 위를 바라볼 나의 친구들
사랑해요
신록이 눈부신 4월의 마지막 날이 오면
언제나 나와 함께해줄 소중한 사람들
더 많이 울고 더 많이 웃으며
사랑해요 더 씩씩하게
이 막막한 슬픔의 바다를 건너
봄날뿐인 우주에서 우리
다시 만나 꼬옥 끌어안고
사랑해요 고마워요
반짝이는 별빛이 될 때까지
사랑해요
- 그리운 목소리로 수인이가 말하고, 시인 성미정이 받아 적다.
《엄마, 나야.》 중에서
수인.
누군가 그랬지. 우리 잘못이 아니라고..
미쳐 돌아가는 세상과 그 미친 세상을 만드는 정부의 잘못이라고.
그런데 수인아, 이런 말들이 내게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아.
두 눈에, 두 귀에 그리고 이 세상 속에서 그토록 삶에 열정적인 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네가 걸었던 길, 함께 운동했던 운동장, 달리기를 연습했던 산비탈, 즐겨 들었던 음악들..
이 모든 건 그대로인데 그 풍경 속에 너만이 빠져 있어.
나의 상실감만큼 너의 고통도 크리라는 걸 알기에 많이 억누르고 참고 이겨 내려고 몸부림 중이다.
나의 잘못된 선택이 너에게 더 큰 슬픔이 될까 봐.
수인아! 사랑하는 우리 아들.
결혼한 지 10여 년 만에 기적으로 내 품에 왔던 너를, 세상은 지독히 이기적인 악몽으로 빼앗아 버렸구나.
너와 함께하고 싶은 시간이 아직도 많이 남았는데, 너와 함께하고 싶은 일들이 너무도 많았는데, 너와 함께하고 싶은 우리의 간절한 마음을 너무도 어이없게 짓밟아 버렸다.
갈수록 쌓여 가는 미안함과 그리움 그리고 상실감.
그럼에도 아침에 눈을 뜨고 하루의 시간을 보내고 또 다른 날을 맞이하는 되풀이되는 일상들.
수인아, 우리 잘하고 있는 거지?
우리 조금 더 있다가 만나도 괜찮은 거지?
너에게 해줄 말이 아직 많지 않아서, "왜?"라고 물어 올 너의 궁금증에 답해 줄 말들을 아직 많이 모으질 못해서 조금 더 세상에 머물게.
우리 서로 미친 듯이 헤매지 않아도 서로를 느끼기에 충분할 만큼 가까이 있는 거지?
아들, 우리 아들 수인아!
사랑하고 또 사랑한다.
수인아, 보고 싶다. 한 번 꽉 안아 보고 싶다.
그리운 아들 수인아.
생일날 새벽에, 엄마가.
《그리운 너에게》 중에서
4월 30일, 곽수인과 "왜?"라고 물어올 아들의 궁금증에 답해줄 말들을 아직 많이 모으질 못해 조금 더 세상에 머문다는 ㅡ 처연한 엄마의 마음을 헤아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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