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시커메질 때마다 들춰 볼.. 어린이라는 세계

2022. 1. 3. 14:05아빠랑

 

왜 있잖아, 너무 맛있는데 양이 많지는 않아서 조금씩 야금야금 먹고 싶은 마음. 그런 책이랄까. 닳는 게 아까워서 장바구니에 진작에 담아두고도 주문하지 않았고, 배송 받고서도 한동안 읽어보지 않다가.. 단숨에 읽어버리고 말았지. 

《어린이라는 세계》

 

플래그잇이 덕지덕지.. 그중 일부만 옮겨 적어두고 마음이 시커메질 때마다 들춰봐야지. 


"그러니까 어른이 되면서 신발 끈 묶는 일도 차차 쉬어질 거야."
그러자 현성이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것도 맞는데, 지금도 묶을 수 있어요. 어른은 빨리 할 수 있고, 어린이는 시간이 걸리는 것만 달라요."
거울을 보지 않았지만 분명히 나는 얼굴이 빨개졌을 것이다. 지금도 할 수 있는데. 아까 현성이가 분명히 '연습했다'고 했는데. 어린이는 나중에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지금도 할 수 있다. 시간이 걸릴 뿐이다.

- 어린이라는 세계, 김소영, 18쪽, 시간이 걸릴 뿐이에요


"언제는요, 피구 할 때 제가 제일 마지막에 남았거든요. 그때 한 이십 번쯤 피했을걸요? 애들이 막 저만 남으니까 저희 팀 애들은 응원하고요, 다른 팀 애들은 화난 것처럼 던졌는데 제가 받았거든요. 아니, 받으려고 마음먹은 게 아니라 공이 와서 안 맞으려고, 그냥 안 맞으려고 딱 했는데 딱 잡은 거예요. 그랬더니 이번에는 공을 막 돌려 가지고 어, 어딨지 하다가 뒤에서 공이 날아와서요, 여기 오른발 뒤꿈치에 맞았어요. 제가 이렇게 돌아보려는데 그때 딱 맞아서 확실히 기억해요."
아람이는 정말 이십 번도 넘게 공을 피했을까? 확인할 길은 없지만 확인할 필요도 없다. 일단 아람이에게는 그게 뒤꿈치에 새겨진 진실일 테니까. 

- 어린이라는 세계, 김소영, 23~24쪽, 선생님은 공이 무서우세요?


아홉 살이 이해하도록 최선을 다해, 또한 내가 지적으로 보이도록 최선을 다해, 인류의 수렵 채집 시절과 농경 시절에 대해 보고했다. 그리고 '잉여 생산물'과 '물물교환'을 설명할 차례였다. 
"그렇게 농사를 짓다 보니까, 드디어! 필요한 것보다 많이 생산하게 된 거야. 우리 마을에서 다 먹고도 남을 만큼 많이! 자,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윤이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나눠 줘요!"
그 밖에 다른 답이 있을 리 없다고 확신하는 얼굴이었다. 이런 하윤이에게 경제 논리를 설명하려니 나는 갑자기 속이 시커먼 어른이 된 것 같았다. 

- 어린이라는 세계, 김소영, 31쪽, 착한 어린이


그런면서 칠판에 "서로 몸이 달라도 ______자"라고 썼다. 내심 '존중하자'라는 말이 나오기를 기대하면서 예지의 답을 기다렸는데 선뜻 답을 하지 못했다. 
"예지야, 그럴 때 '무시'의 반대말을 떠올려 보면 좋아."
"아! 알았다!"
유일한 답이라는 듯, 예지는 이렇게 썼다."
"서로 몸이 달라도 같이 놀자."
그 순간 나는 예지에게 백오십 번째로 반했기 때문에 정신이 혼미해졌지만 '존중'이라는 단어를 가르치겠다는 일념으로 다시 기회를 줬다. 예지는 이번에는 이렇게 썼다. 
"서로 몸이 달라도 반겨 주자."

- 어린이라는 세계, 김소영, 36쪽, 착한 어린이


내가 제공하면서 내가 더 좋아하는 독서교실 서비스가 하나 있다. 어린이의 겉옷 시중을 드는 것이다. 어린이가 독서교실에 들어오면 일단 가방을 받아서 정리한다. 그런 다음 어린이 뒤에서 외투 벗는 것을 돕는다. 이때 너무 가까이 가면 안 된다. 외투 자락 말고 다른 데는 되도록 내 손이 닿지 않게 조심한다. 너무 빨라도 느려도 안 된다. 제일 중요한 건 어린이가 팔을 뺄 때 크게 움직이지 않아도 되게 하는 것이다. 어린이 입장에서는 어깨만 조금 움직였을 뿐인데 스르륵, 외투에서 빠져나왔다는 느낌이 들어야 한다. 어린이에게 받은 옷은 옷걸이에 끼워서 모양을 잡아 걸어 둔다. 이 부분은 민첩하게 처리한다. 기다리는 동안 손님이 어색해지면 안 되니까.
수업이 끝나고 집에 갈 때도 당연히 시중을 든다. 이게 더 어렵다. 외투를 벗을 때처럼 입을 때도 양팔을 동시에 소매에 끼워야 하는데, 익숙하지 않은 어린이들은 호낮 입을 때처럼 한 팔을 먼저 끝까지 넣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면 다른 쪽을 끼울 때는 팔을 접고 끙끙대게 마련이라, 시중을 드는 게 오히려 어린이를 불편하게 하는 셈이 된다. 그러면 나는 어린이 앞으로 가서 얼굴을 보며 이야기한다. 
"선생님이 이렇게 하는 건 네가 언젠가 좋은 곳에 갔을 때 자연스럽게 이런 대접을 받았으면 해서야. 어쩌면 네가 다른 사람한테 선생님처럼 해 줄 수도 있겠지. 그러니까 우리 이거 연습해보자."
어린이는 어깨에 힘을 빼고 자연스럽게, 양팔을 조금만 뒤로 하고 서 있으면 된다. 그러면 내가 옷을 끼워 준다. 스르륵, 탁. 부드럽게 옷 입기가 끝나면 매무새를 손질하느라 그러는지, 기분이 좋아서 그러는지 어린이가 어깨를 으쓱인다. 처음에는 이 과정을 영 쑥스러워하던 어린이도 몇 번이면 익숙해져서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나에게 자연스럽게 등을 대기도 한다. 그럴 때면 슬쩍 웃는 얼굴이 되는 것을 나는 여러 번 보았다. 그런 순간 때문에 이 서비스를 좋아한다. 
어딘가 좀 할머니 같은 말이지만, 나는 어린이들이 좋은 대접을 받아 봐야 계속 좋은 대접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안하무인으로 굴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내 경험으로 볼 때 정중한 대접을 받는 어린이는 점잖게 행동한다. 또 그런 어린이라면 더욱 정중한 대접을 받게 된다. 어린이가 이런 데 익숙해진다면 점잖음과 정중함을 관계의 기본적인 태도와 양식으로 여길 것이다. 점잖게 행동하고, 남에게 정중하게 대하는 것. 그래서 부당한 대접을 받았을 때는 '이상하다'고 느꼈으면 좋겠다. 사실 내가 진짜 바라는 것은 그것이다. 

- 어린이라는 세계, 김소영, 38~41쪽, 어린이의 품위


한산해진 동네 놀이터를 지나다가 하준이 생각이 났다. 원래는 놀이터에 어린이들이 있다 싶을 때 다가가 보면 언제나 하준이가 있다. 나를 알아보고 달려와 인사할 때 보면 땀 때문에 머리카락이 이마에 딱 달라붙어 있다. 몸에서는 모락모락 김이 날 지경이다. 때로는 공을 차느라 급해서 멀리서 내게 손만 흔들어 보이기도 한다. 그럴 땐 마주 손을 흔드는 나까지도 싱싱해지는 것 같다. 한번은 수업 때 '내가 좋아하는 놀이 설명하기'를 했다. 하준이는 '정글짐 술래잡기'하는 방법을 내게 가르쳐 주었다. 
"떨어져도 술래, 잡혀도 술래예요. 다섯 명이나 여섯 명이 하는 게 제일 좋아요. 더 많으면 정신없고, 더 적으면 심심해요." 
나는 또 걱정을 버리지 못하고 물었다. 
"떨어져서 다치면 어떡해?"
그러자 하준이는 웃는 얼굴로 나를 안심시켰다. 
"밑에 모래 있으면 떨어져도 안 아파요."
그렇지, 모래가 있었다. 놀이터의 모래 때문에 뛰기 어렵고, 모래가 자꾸만신발 속에 들어가 불편하다고만 생각했는데. 하준이는 바로 그런 모래를 믿고, 떨어져도 다칠 걱정 없이 아찔한 정글짐을 올랐던 것이다. 나는 마치 격언인 것처럼, 하준이의 말을 그대로 외웠다. "밑에 모래 있으면 떨어져도 안 아파요." 이 말을 떠올릴 때마다 어른의 역할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

- 어린이라는 세계, 김소영, 62~63쪽, 놀이 아니고 놀기


어린이들도 이 쇼를 본다. '세트장'이 아닌, 유명 연예인의 실제 집과 거기 살고 있는 다른 어린이를 본다. 대수롭지 않게 보아 넘기는 어린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어린이에게는 그 집이 꿈속의 것처럼 크게 보일 것이다. 그 어린이는 어떤 상황에서 TV를 보고 있을까? 누구와 볼까? 부모와 함께 볼까? 혼자 볼까? 무엇을 하면서 볼까? TV가 놓인 곳은 어디일까? 그 어린이는 화면 속 아이를 부러워할까? 자기 현실과 너무 먼 일이라 아무 상관이 없을까? 만일 상관이 없다고 한다면, 정말 아무 상관이 없을까? 그런 생각에 화면을 똑바로 볼 수가 없다. 
어떤 어린이는 여전히 TV로 세상을 배운다. 주로 외로운 어린이들이 그럴 것이다. 어린이도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라면, 가장 외로운 어린이를 기준으로 만들어지면 좋겠다.  

- 어린이라는 세계, 김소영, 101~102쪽, 가장 외로운 어린이를 기준으로 


검찰은 가해자에게 무기징역을 구형했으나 판사는 징역 22년을 선고했다. 가해자가 어렸을 때 부모의 이혼, 폭력 등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형을 낮춘 이유였다. 사망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최악의 결과 앞에서도 가해자의 사정을 헤아려 준 것이다. 형을 모두 채운다 해도 가해자는 중년에 자유를 찾는다. 
가해자가 성장 과정에서 겪은 일을 범행을 정당화하는 데 소비하는 것은 학대 피해 생존자들을 모욕하는 일이다. '학대 대물림'은 범죄자의 변명에 확성기를 대 주는 낡은 프레임이다. 힘껏 새로운 삶을 꾸려 가는 피해자들을 '불우한 가정에서 자란 예비 범죄자'로 보게 하는 나쁜 언어다. 가정에서 아이를 학대해선 안 되는 이유는 아이를 아프게 하고, 존엄을 무너뜨리고, 상처를 남기기 때문이다. 그것만으로도 이유는 충분하다. 가해자의 잔인한 범행을 나는 '악惡'이라는 개념 말고 다른 것으로 이해하지 못한다. 악행의 기승전결은 전혀 알고 싶지 않고, 합당한 벌을 받기를 바랄 뿐이다. 

- 어린이라는 세계, 김소영, 161~162쪽, 삶을 선택한다는 것


존댓말로는 명령하기도 어렵다. 규민이가 나한테 과자를 줄 때 잘 하는 말, "이거 꼭 먹으세요"는 어떤가. "드세요"보다 "먹어"가 훨씬 강력한 요구다. 상대에게 맛있는 걸 꼭 먹이겠다는 굳은 의지는 존댓말로는 잘 표현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규민이의 "먹으세요"가 너무 좋다. 
어른들 사이에도 한쪽은 반말을 쓰고 한쪽은 존댓말을 쓰는 상황이 펼쳐질 때가 있다. 상사와 부하 직원, 시어머니와 며느리, 선배와 후배처럼. 이들의 대화에서 감정을 편하게, 온전히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은 어느 쪽일까? 반말을 하는 쪽이다. "생일이다?"의 물음표 부분에 해당하는 '분위기'도 반말을 하는 쪽은 전달할 수 있다. 존댓말을 하는 쪽은 자기 감정을 표현하기보다는 상대가 표현한 감정을 알아차리고 대응한다. 인류학자 김현경이 『사람, 장소, 환대』에서 "존비법의 체계는 인간관계가 원활하게 굴러가는 데 필요한 감정 노동을 '아랫사람' 몫으로 떠넘기는 문화와 연결되어 있다"라고 지적한 대로다. 

- 어린이라는 세계, 김소영, 190~191쪽, 저 오늘 생일이다요?


어린이는 공공장소에서 예의를 지켜야 한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어디서 배워야 할까? 당연하게도 공공장소에서 배워야 한다. 다른 손님들의 행동을 보고, 잘못된 행동을 제지 당하면서 배워야 한다. 좋은 곳에서 좋은 대접을 받으면서 그에 걸맞은 행동을 배워야 한다. 

- 어린이라는 세계, 김소영, 213쪽, 쉬운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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