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9. 27. 23:18ㆍ아빠랑
우리가 이 책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오랜 시간 구축해온 인간의 윤리와 정의를 한순간에 무너 뜨리고자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정확히는 우리가 믿어왔던 세상에 대한 무언가가 무너지는 경험이다. 모두가 해당되지 않으면 아무도 해방될 수 없다. 이 당연한 말을 다시금 깨닫는 순간, 우리가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폭력적인 시기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다가왔다. 도처에 널린 고통과 비명이 온 피부로 느껴졌다. 인권 너머에, 인간의 권리가 닿지 않는 외지고 불쾌한 감금시설에 동물들이 자리해 있다.
- 23~24쪽, 직접행동DxE
'물건' 취급받던 새벽이의 삶은, 끊임없이 돼지를 '생산'해대는 종돈장에서 벗어난 후 분명히 달라졌다. 그러나 그가 살아갈 사회까지 달라진 것은 아니기에, 그가 동물답게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은 정말 찾기 어려웠다.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은 정말 찾기 어려웠다. 땅값이 그나마 저렴한 도심 외곽 지역에는 곳곳에 도살장과 농장이 즐비해 있었고, 연례행사처럼 발생하는 '가축 전염병 살처분'의 존재 때문에 그 주위는 상당히 위험했다. 그 끔찍한 살처분 현장을 마주하고도 사회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설처분의 목적은 더 많은 돼지를 죽이기 위한 '전략적 예방책'이기 때문이었다. 이토록 폭력에 무감하고 일상적인 죽음이 가려지는 사회였기에 새벽이는 반드시 살아남아 증언해야 했다.
- 72~73쪽, 향기
새벽이는 한 달에 약 '100만 원'을 먹고 살았다. 최대한 저농약으로 구매하여 베이킹소다에 과일과 채소를 빡빡 씻어 식사 준비를 하는 것으로 생활했지만, 식비가 모자라는 일이 종종 발생했다. 집중호우로 농산물 가격이 급등할 때, 보수공사처럼 예상치 못한 변수로 갑자기 목돈이 나가게 될 때 등 식비를 충당하기 어려울 땐 긴급 모금을 열어야 겨우 유지될 수 있었다. 새벽이가 생추어리에 입주한 날부터 나는 1년 안에 활동가들이 꾸준히 임금을 받으며 활동할 수 있는 걸 목표로 했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우리에겐 지금보다 더 많은 후원자가 필요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돼지'라서 외면하는 이 사회의 종차별적인 인식을 더욱 깨부숴야 한다. 사실 이 어마어마한 식비와 여러 공사 비용이 발생하는 이유는 모든 땅을 인간들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고, 그 때문에 결국 새벽이가 '갇혀'있고, '자금'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 105쪽, 향기
일정을 마치고 도살장을 나와 각자의 도시로 돌아왔을 때 피투성이가 된 나의 운동화 밑창으로 걷는 도시는 너무나도 깔끔했다. 길거리에는 이 시대 인간들의 과잉된 식량이자 유희가 되어버린, 내가 보고 온 시체 덩어리가 그대로 매대에 즐비해 있었다. 아무도 그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기돼지의 얼굴 가죽을 막 벗겨 담은 냉장고에는 해맑게 웃고 있는 아기돼지들의 얼굴 사진이 붙어 있었다. 도시의 간판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듯 심지어는 어딘가 기뻐 보이게 웃고 있는 돼지 캐릭터가 제 살점을 들고 먹으라 광고하고 있었다. 괴리된 도시는 어디에도 없었던 행복한 돼지를 앞선에 내세우며 여러분은 생각하지 말고, 안심하고, 의심하지 말고, 그저 많이, 더 많이 먹어 삼키라 하였다. 방금 전 내가 분명하게 보고 듣고 맡고 온 현실은 모두 거짓처럼 느껴졌다.
- 126쪽, 은영
내가 집에 가두어졌을 때. 온전히 먹고 씻을 수 없는 시간을 기약 없이 버티던 때. 바닥에는 깨진 유리가 가득하고 피가 흥건하고 침대 시트까지 피가 튀어 올랐을 때. 물건이 부수어지고 문짝이 찢어질 때. 겨우 나간 거실에 빈 술병들이 굴러다닐 때. 머리카락이 뭉텅이로 뽑혔을 때. 옷들이 찢어졌을 때. 작은 경찰차에서 늘어놓은 증언이 무의미했을 때. 더 이상 좁은 방 문턱을 나설 수 없게 되었던 시간이 떠올랐다. 나는 인간으로 도살장 안에 끌려 들어가지 않고 그 앞에 서 있지만, 여기에 온 동물들과 내가 본질적으로는 같다고 여겨졌다.
-132~133쪽, 은영
우리는 빠른 속도로 모든 것을 파괴하는 폭력에 할 수 있는 제동을 걸어보기로 했다. 무섭고 두려운 일이었다. 한밤중에 낯선 감금시설에 침입하여 우리도 잘 모르는 몇 명을 보란 듯이 구조해내는 일. 학살을 당연시하는 체제가 합법인가? 그렇다면 합법이 곧 정의인가? 구조가 불법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법의 경계를 보란 듯이 넘어 구조해내겠다고, 부정의한 법을 정면으로 거부하고자 했다. 구조 자체가 실패하더라도, 우리는 감금시설과 학살 현장의 현실을 사회에 충분히 효과적으로 폭로할 전략을 가지고 있었다. 축산업의 셀 수 없는 파괴와 폭력을 뒤로하고 풀뿌리 활동가들의 비폭력 직접행동의 용기를 축산업의 논리대로 특수절도의 형벌을 덧씌워 억압할 것인가?
무엇보다 중요한 건 우리가 함께 모여 진실을 마주하기를 시작했다는 사실이었다. 우리의 위선적이고 시혜적인 자리를 박차고 경계를 넘어 사회가 불법이라고 하는 동물들 곁에 함께 불법적인 존재로 서서 이야기하고자 했다.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서 감금된 것은 동물이었지만 세상의 폭력적인 인식에 갇혀 있는 것은 우리 모두이기도 했다.
- 141~142쪽, 은영
그런 '지옥'은 본 적이 없었다.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사랑', '정직' 등의 가치관을 추구한다는 그 '친환경 우수 종돈장'은 낮에 둘러봤을 때 꽤 아름다웠고 심지어 마음에 평온한 느낌을 줬다. 그러나 가려진 악이 더 무섭다는 것을 증명하듯 밤에 찾아 들어간 그곳에는 엄청난 감금·학대 시설이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지옥의 유황불이 꺼지지 ㅇ낳고 타오르듯 한밤중에도 시설 안은 눈부시게 환했다. 끊임없이 먹고 살이 찌도록 낮밤 구분을 없앤 것이다. 찜통 같은 여름에 창문 하나 없는 샌드위치 패널 건물들이 늘어서 있었고 뿜어져 나오는 분변의 악취는 정전으로 환풍기가 멈추면 갇혀 있는 이들이 모두 질식사한다는 말이 과장이 아님을 확인해 주었다. 갇힌 이들은 서로의 몸을 들이받거나 철창을 씹으며 몸부림치고 있었다. 사고가 멈추었다. '동물해방'의 의미가 그 무엇이 되었든 그곳에서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정신을 붙잡고 우리는 오천 명이 넘는 감금된 이들 중 아기돼지 세 명만을 가까스로 구조해 도살장이 아닌 병원으로 향했다. 새벽이, 노을이, 별이. 그들과 함께 탄 차 안에서 새벽 도로 위를 달리는 동안 나는 단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그동안 내가 그 눈동자들을 짓밟고 세워진 사회에서 깔끔하게 떠들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 169~170쪽, 섬나리
나와 비슷한 시기에 처음 도살장에 간 은영과 향기는 곧 마치 '자신이 죽은 것처럼' 통곡을 하였다. 아니, '자신이 죽인 것처럼'이 좀 더 정확할 것 같다. 트럭 바닥에 흥건한 피, 그 와중에 우리에게 이마를 부비는 순간 도살장으로 끌려가던 흰 소를 보고 "이렇게 죽이고 사는 삶은 가치가 없습니다!"라고 소리 지르며 바닥에 주저앉아 통곡하던 은영을 기억한다. 은영은 마치 송아지를 빼앗긴 엄마 소가 된 것처럼 거의 일주일을 울며 굶었다. 또 우리가 구조한 닭장차를 스스로 탈출한 여름이를 빼앗길 때, 여름이 대신 차라리 나를 도살해달라고 피 흘리며 울던 향기를 기억한다. 그해 여름, 향기는 품에서 빼앗겨 도살장 안으로 던져진 여름이의 그 가볍고 따스했던 몸에 대한 상실감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 203~204쪽, 섬나리
훔친 돼지만지 살아남았다, 향기·은영·섬나리, 호밀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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