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간마다 고인 여성의 삶 : 19호실로 가다

2021. 10. 4. 19:52아빠랑

 

《다섯째 아이》를 읽고 인상 깊어서 근래에 출간된 단편선을 바로 구입했다. "여성의 사유와 문장"을 들여다보며 "행간마다 고인 여성의 삶"에 주목한다. 표제작 '19호실로 가다'와 '옥상 위의 여자'가 기억에 남았다.

 

 

세 사람 모두 기진맥진했다. 다들 날씨에 대해 투덜거리고 있었다. 특히 스탠리는 기분이 최악이었다. 일을 마치고 짐을 챙기기 전에 세 사람은 오늘도 그 여자를 보러 갔다. 그녀는 엎드려서 잠들어 있는 것 같았다. 엉덩이를 가린 진홍색 삼각형 천 조각만 빼면, 몸뒤편의 맨살이 모두 드러나 있었다. "난 양심적으로 저 여자를 경찰에 신고해야겠어요." 스탠리가 말했다. 그러자 해리가 대꾸했다. "너 왜 그래? 저 여자가 너한테 뭘 했다고?"
"그러니까, 저 여자가 내 아내라고 생각해보세요!"
"하지만 아니잖아요, 안 그래요?" 톰은 해리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스탠리의 태도를 불편하게 여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평소 스탠리는 머리가 잘 돌아가고 일손이 빠르며 우스갯소리도 많이 하는 좋은 사람이었다.
"어쩌면 내일은 좀 덜 더울지도 모르지." 해리가 말했다.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더 더웠다.

 

- 70~71쪽, 옥상 위의 여자

 


그때의 느낌을 제대로 묘사하기가 힘들다. 내 손은 크지 않고, 내 심장은 A와 점심을 먹고 B와 차를 마시고 C와의 만남을 기대하면서 부풀어 있는 상태였다... 어쨌든 내 손가락들은 조금 크고 가벼운 듯한 미지의 것을 감싸려고 필사적으로 뻗어나갔다. 그래서 나는 C에게 잠깐만 실례할게요 하고 말한 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랬더니 내 손에 내 심장이 쥐어져 있었다.

 

- 91쪽, 내가 마침내 심장을 잃은 사연

 


가끔 부인도 낮잠을 잘 때가 있다. 나는 그녀와 내가 위아래 층에서 반듯이 누워 있는 모습을 생각한다. 마치 우리가 선반을 한 칸씩 차지하고 누운 것 같다.

 

- 147쪽, 방

 


"마을 여자들은 전부 그런 걸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어. 누군가가 여자들의 일을 질서 있게 정리해서 여자들이 가끔 반나절 정도 쉴 수 있게 해줘도 여자들은 그걸 모욕으로 받아들이겠지. 일을 그만두질 못해. 어머니를 봐. 어머니는 일주일에 두세 번씩 돈커스터에 와서 과자 포장하는 일을 하잖아. 그런데 따지고 보면 돈을 버는 게 아니라 오히려 손해를 보고 있어. 버스비를 내야 하니까. 그래서 내가 어머니한테 그런 얘기를 했더니 어머니는 '나도 밖에 나가서 바람을 좀 쐬고 싶어서 그래'라고 하는 거야. 바람을 쐬다니! 망할 공장에서 과자 포장하는 일이나 하면서. 하루 저녁 시내에 나가서 좀 졸겁게 놀아도 되잖아. 과자를 포장하는 노동을 하면서 어떻게든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생각 같은 건 하지 말고. 게다가 그 일을 하면서 오히려 손해를 보고 있는데. 도무지 말이 안 돼. 여자들도 사람이야, 안 그래? 그냥..."
"그냥 뭐?" 레니가 화를 내며 물었다. 찰리의 장광설을 듣는 동안 그의 입술에는 점점 힘이 들어가고, 눈은 가늘어졌다.

 

- 165~166쪽, 영국 대 영국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이 빗속에 서서 날 위해 슬퍼하는 일은 절대 없겠지. 그녀는 그동안 나를 생각한 적도 없을 거야. 그녀가 언제 나한테 신경이라도 쓴 적이 있었나... 없어... 난 이렇게 바보처럼 서서 그녀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녀는...
선명하고 차가운 분노가 전기처럼 그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그는 방금 결단을 내린 사람답게 힘찬 발걸음으로 자신의 인생을 향해 걸어갔다.

 

- 274쪽, 20년

 


이것은 지성의 실패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롤링스 부부의 결혼생활은 지성에 발목을 붙잡혔다.

 

- 277쪽, 19호실로 가다

 


마치 이 정원 안에 적이 도사리고 있는 것 같았다. 수전은 자신에게 엄격하게 말했다. "이건 모두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야. 처음에 나는 어른이 된 뒤 12년 동안 일을 하면서 나만의 인생을 살았어. 그리고 결혼했지. 처음 임신한 순간부터 나는, 말하자면 나 자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넘겼어. 아이들에게. 그 후 12년 동안 나는 단 한순간도 혼자였던 적이 없어. 나만의 시간이 없었어. 그러니까 이제 다시 나 자신이 되는 법을 배워야 해. 그뿐이야."

 

- 290쪽, 19호실로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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