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 생활에서의 평등

2021. 10. 9. 17:50아빠랑

좋은 글은 아예 필사를 한다.

<가족관계 변화를 만들어가는 남성들의 젠더 인문학>에서 문장들을 읽어줬다. 

 

 

현실 생활에서의 평등

직장인의 애환을 그린 만화 <미생>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가정생활과 직장 생활을 병행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는 여자, 선 차장의 에피소드였다. 그녀는 회사에서는 없어서는 안 되는 유능한 인재지만 아직은 엄마의 손을 많이 필요로 하는 어린아이를 두고 있다. 그렇다고 회사를 그만두게 되면 가정의 전체 수입은 줄어들고 자신의 커리어는 단절된다. 하지만 아이에게는 그녀만이 유일한 엄마인 것이다. 선 차장은 저녁에 퇴근해서 남편에게 상의하기로 한다. 자, 이때 거실의 풍경.
남편은 소파에 편히 앉아 승진 시험 준비를 하고 있고 아내는 바닥에 철퍼덕 앉아 건조가 끝난 빨래를 개키고 있다. 퇴근을 하고 집에 와서 아내는 계속 가사일을 해야만 한다. 이 불평등한 모습이 주는 불쾌한 충격은, 이 모습이 실제로 우리가 현실에서 겪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가사 분담의 문제는 우리가 머리로는 이론적인 성평등을 외치지만, 현실 생활 속에서는 쉽게 구현하지 못하고 겉으로도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는 예민한 소재다.

가사 분담 문제가 어려운 이유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적으로 규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갈등으로 마음이 고통스럽기보다 차라리 몸이 피곤한 게 낫겠다 싶어 많은 여자들은 '그냥 내가 하고 말지'라며 체념한다.

내 남편은 서른 중반 나이에 결혼하기 전까지 가사일에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던 남자다. 위로 착한 누나 셋, 그리고 아들을 끔찍이 사랑하는 헌신적인 어머니와 아버지가 계시다. 반면 나는 고등학생 때부터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고 자취를 했다. 이런 남자와 여자가 만나 부부의 연을 맺으면 어떤 그림이 그려지리라 쉽게 상상이 갈 것이다. 결혼 초반에 가사 분담의 문제로 그 여자와 그남자는 부엌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밤을 새워서 싸우다가 곧장 출근하기도 했다. 그리고 싸움 횟수만큼 남자는 점점 더 가사일을 분담하게 되었다.
평균적인 386세대의 남자라거나 그가 자란 남아선호적 환경을 고려해보면 지금 이만큼 가사 분담을 하는 게 감개무량하다. 그런데 여기서의 슬픔은 남편이 환골탈태해서 노력한들 그 수준은 내가 원하는 가사 분담의 기준을 완벽히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점에 있다. 물론 남편들 중엔 시키면 거부하고 하지 않거나, 꾸물거렸다가 투덜대며 하는 이들도 있다. 시키면 하라는 대로 해주는 남자는 양반이 아닐까? 한데 나는 그게 성에 차지 않는 것이다. 
"네가 하라는 대로 할게."
마님의 분부만 기다리겠다는 머슴 같은 대가사 그다지 기쁘지가 않다. 그 말의 행간에 스스로가 가사일에 대한 주인의식이 없음이 드러난다. 주도권이나 자발성, 책임을 갖지 않겠다는 얄미운 선언처럼도 들린다. 그러니까 자신은 어디까지나 '협조적인' 비관련자의 입장으로 남고 싶다는 거? 뭐 하나 시킬 때마다 사랑과 존중의 마음으로 '부탁'하고 일을 어설프게 끝내놓은 다음에도 반드시 '칭찬'해주는 것, 아, 이것 자체도 피곤한 일이다. 
가사 분담에 대한 '파블로프의 개' 훈련을 반복하면서 한 가지 오해를 풀었던 것은 그들이 '일부러' 나 몰라라 하는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내 남편 포함 많은 남자들은 '몰라서' 먼저 하지 않거나 '해야 된다'는 의식 자체가 자동탑재 되어 있지 않았다. 즉 그들 스스로가 태생적으로 깔끔한 결벽증 타입이 아닐 바에야 먼저 알아서 가사일을 처리해야겠다는 생각 따위 머릿속에서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렇게 키워져왔으니까. 힌트는 처진 눈초리로 나를 이르던 이 말 한마디였다. 
"피곤해? 그럼 하지 마~."
이 말 한마디에 가사일에 대한 남자들의 기본 감각이 얼마나 근본적으로 마비되어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여자가 "피곤하고 힘들다"고 푸념하며 신경질 내는 것을 번역하자면 "여보, 내가 지금 피곤하고 힘드니 이건 당신이 해"라는 말이다. 
그런데 남자들은 '피곤하고 힘들다'를 곧이곧대로 '피곤하고 힘들다'로밖에 이해하지 못한다. 반면 여자들은 가사일에 대해서는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이 있음을 어느샌가 슬프게 체득하고 만다. 
그런 전후 사정에 대한 센트가 없는 그들에게 "당연히 같이해야 하는 일인데 왜 내가 '부탁하듯' 말해야 돼?"도 만만치 않게 열받는 지점이다. 그래 봤자 강아지 눈망울을 하며 원망스레 나를 바라볼 뿐이다. 아내는 힘겨워하고 남편은 억울해하고.

가사 분담을 하고 하지 않고를 논하기 이전에 '내가 꼭 말로 일일이 시켜야 하는 것'에 더 화가 난다지만 내 개인적 경험에 비추어 말하자면 정말이지 남자들은 말을 해야만 알아듣는다. 악의가 없으므로 더 울화통이 터지지만 하는 수 없다.
어쨌든 "곧 죽어도 가사일은 못 하겠다"라고 선언하는 남자가 아니라면 남은 일은 꾸준한 길들이기밖에는 없다. 처음 하는 생소한 모든 일에 그러하듯이. 여기서부터는 아내들의 인내심이 필요하다. 매번 일을 하나하나 시켜야 한다. 처음엔 행동이 굼뜨기 때문에 같은 말을 반복해야 한다. 하겠다고 해놓고선 잊어버리기도 하니, 속에서 열불이 터져도 화내지 말고 다시 무엇을 해달라고 말해야 한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사랑의 마음이 우러나서라기보다 단지 아내한테 잔소리를 듣기 싫기 때문에 가사일을 하기 시작한다. 아내의 심기가 불편하면 본인도 불편하니까. 동시에 그들은 지시받고 조종당하는 기분을 싫어한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남자에게 일을 다 하면 칭찬을 꼭 해줘서 기분 좋게 해 다음에 또 하게 만들라는 '칭찬 요법'을 권하지만 나는 그렇게까지는 못 하겠다. 아니 하기 싫다! 가사일이 끝났을 때 아무도 그에 대한 고마움이나 고됨을 평해주지 않는 그 적적함과 허탈함을 너도 느껴봐야만 한다!
처음 일을 시키고 몇 차례 반복하면 하나의 습관이 만들어진다. 말을 굳이 부드럽게 부탁식으로 하지 않아도 아내가 어떤 일을 해야 한다고 주지시켜주면 남편은 그 일에 반자동적으로 착수한다. 경험이 더 쌓이면 이젠 문장이 아닌 단어 몇 마디, 눈에서 뿜어지는 빔 한 줄기로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 곧잘 알아듣게 된다. 
어느덧 남편은 '어떤 경우에 아내가 자신에게 일을 시킬 것인가'를 사전에 감지하기에 이른다. 이제는 어떤 '징조'가 보이면 내가 시키기 전에 "밥 먹고 내가 설거지할 테니까 놔둬~" 같은 선언을 먼저 함으로써 애처럼 칭찬을 바란다. 물론 나는 "그래, 고마워~"라고 대꾸하지만 뚜껑을 덮어 반찬 통들을 냉장고에 집어넣는 것부터가 설거지임을 깨달을 날이 올 때까지 칭찬은 하고 싶지 않다.

앞서도 말했지만 처음 남편에게 가사일을 시킬 때 남편이 순순히 내가 원하는 대로 따라주지 않으면 답답하거나 싸울까 봐 '에일, 시키느니 내가 그냥 하고 말지' 싶겠지만 부디 그 순간의 불편함을 견뎌내주기를 바란다. 내 마음이 불편하느니 차라리 몸이 힘들겠다라고 생각해서 그 순간을 참지 못하면 시간이 지나 몸은 몸대로 마음은 마음대로 힘들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가사 분담은 한 가정에 대해 부부로서 책임을 함께 지는 문제이자 가정 자체가 불행해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기에 내가 남편을 개선시키는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갈등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가사 분담 때문에 몇 번의 갈등과 싸움을 겪다 보면 경제력을 가진 여자들은 가사도우미의 도움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도 한다. 그건 그것대로 효율적이지만 나는 다른 여자의 노동력을 빌려 쓰는 것에 대해 그다지 마음이 편치가 않다. 감정 노동하지 않으니 편하고 좋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대면하지 않는 것 같아서다. 
우리 가정은 남편과 나, 둘이 같이 구축한 세계다. 우리가 더럽힌 것, 먹는 것, 우리가 낳은 것, 모두 우리가 직접 앞가림과 뒷바라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타인의 노동력을 빌리기보다 우리는 우리대로 효율성을 기해보기로 한다. 
가사일을 최소화하고 불필요한 물건은 그때그때 다 버린다. 청소하기 가장 편한 도구를 구비한다. 기계가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은 기계의 힘을 적극 빌린다. 외식은 줄이되, 시간을 아끼기 위해 건강하게 만든 반찬들을 주문해서 먹는다. 매번 직접 차려 먹지 못한다고 해서 죄책감을 가지지 않고 사 먹더라도 건강식을 사 먹는다. 

초기에는 가사일을 한 번 시키는 게 그렇게 힘들어도, 가사 분담 문제로 불편하거나 싸웠다 해도, 가사 분담에 관한 소통 패턴을 만들어서 주도하면 어느새 점점 부부간의 자연스러운 협업 체제가 만들어져간다. 남편도 몸에 익어 점점 덜 버거워하고 가사일을 하면 할수록 보기보다 힘든 거구나, 를 통감하면서 그간 아내의 일방적인 수고를 미안해하고 자신이 더 해야 할 책임을 느낀다. 직접 해보지 않으면, 그것도 의무적으로 반복해보지 않으면, 그것이 보기보다 얼마나 고된 노동인지를 알 수가 없다. 
이제는 신경을 예민하게 곤두세울 필요 없이 도움이 필요할 때 남편에게 말하면 바로 한다. 시키지 않아도 설거지가 쌓여 있으면 알아서 말없이 치운다. 밥을 할 줄 알게 되었고 혼자 밥을 먹어야 할 때는 스스로 챙겨 먹을 줄 알며 분식 요리는 그가 도맡아 한다. 아직 내가 하는 가사의 양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가 처음 서 있던 장소에서 아주 멀리 걸어온 점만큼은 인정하고 싶고, 조직에 묶이지 않은 내가 시간을 좀 더 융통성 있게 써서 틈을 메꾸면 된다고 생각한다. 
평등의 모습이 항상 5대 5일 필요는 없다. 어떨 때는 1대 9일 수도, 3대 7일 수도, 6대 4일 수도, 8대 2일 수도 있다. 그가 일로 늦으면 내가 집안일을 하면 되고 내가 몸이 아파 누워 있으면 그가 아이를 챙겨 먹이면 되었다.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조금 더 했다고 손해 봤다며 억울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반대의 경우로도 인생의 많은 날들을 채우게 될 테니까. 서로의 노고를 고마워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걸로 경시하지 않는 것. 그것을 받아들이기만 해도 많은 것을은 사랑으로 함께해나갈 수 있다. 악처를 연기할 필요도, 현모양처로 무리할 필요도 없다. 인간적인 공정함과 낭만적인 관대함을 최선을 다해 양립해나가고 싶다. 우리는 그렇게 조금씩 더 나아질 것이다.

- 태도에 관하여, 임경선, 80~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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